사랑의 신의 의한 운명의 수정

오늘 날의 운명은 우리에게 있어 이미 결정되었진만 신 앞에는 수정의 여지가 있다. (본문중에서)

 인간의 운명은 어떤 것일까? 타력에 의해서 정해지는 겻일까. 잔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일까. 이미 정하여진 길이 있어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걸까? 가지않은 길을 한번씩 뒤돌아보며 미래의 길을 개척해보기도 하는 못 사람들 좀더 나은 날을 희망하며 하루하루 보내지만 뜻대로만 되지 않는 나날. 여기에 실린 이야기는 사전에 예지된 운명을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었던 실화와 더불어 어떻게 하면 그 운명을 개선, 수정해 날갈 수 있는가 하는 실예도 실려 있다.

 

 유명한 독일의 천문학자 데비드 파브리시아스는 161757일 죽는다는 예감을 갖게 되었다. 그는 어떻게든지 그 운명을 벗어나려고 하여 그 날이 되자 종일토록 집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닸다. 어느덧 밤 10시 경이 다 되었다. 그는 안도의 마음으로 대문 밖에 나와서 상쾌한 공기를 즐기고 있었다. 그 대였다. 별안간 오래전 원한관계에 있었던 한 농부가 달려와서 곡괭이를 가지고 그를 때려 죽이고 말았다. 또 죽음의 기묘한 한 예는 레자르 헤르렌바하남작의 자서전에도 있다.레자르 박사는 연구관계의 일로 지질협회 화학부장인 하우에르 씨의 실험실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전날 밤의 꿈에 한 사람의 사나이가 파랗게 질려 두 남자에게 팔을 잡혀있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이 꿈을 염두에도 두지 않고 다음날 아침에 하우에로씨를 붙잡고 있었다. 그는 극약으로 자살을 기도했고 꿈에서 본 그대로의 모습으로 두 사람의 사나이가 그를 부축하여 복도로 테리고 나오고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 꿈과 사실과의 부합을 목격하 헤로렌바하 남작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약에 몇 분이라도 빨리 도착했더라면 자신은 분명히 그 사람의 자살을 말릴 수가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우에로씨의 자살의 원인은 가정과 금전문제에 있었으며 나는 그에게 새로운 일거리와 금전상의 원조를 주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하우에로씨 측에서 생각한다면 몇 분 동안만 자살을 참고 있었다면 자살을 할필요가 없어졌을 것이다. 이 몇 분 동안을 무엇때문에 그는 기다리지 못했던가,외부의 힘은 규정하고 있지 않다. 설사 자살을 강요하는 오적사정의 강요가 있다 하더라도 자살을 하는데 특정한 시간을 설텍하다는 것은 그의 자유의사이나까 그는 구원이 다가왔는데도 다만 수분동안에 구제할 수없는 특정시간에 자살 을 택한것은 그의 잠재의식의 바다에서 명백해 떠오른 인도에 의한 것이니까, 그의 잠재의식의 눈 앞에다가 온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 거절했다고 말하수 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미래의 사건을 우리가 사전에 알 수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잠재의식이 미래의 사건을 아는 힘을 가졌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그와같은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홀륭한 잠재의식이라는 것을 가지면서도 예지할 수 있는 불해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즉 표현을 달리하면 그자신의 잠재의식이 자기 처벌을 원하고 있는 것이가. 스스로 벌을 받아댜 한다'고 생각하는한 그는 그방향으로 끌려가고야 마는 것이다.



신의 아들에 어루리지 않는 생각을 해소하려는 '평형운동' 이 불행, 고난이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신으 사랑과 진리 그 자체이므로 죄인을 만들거나 벌을 주거나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신의 아들인 자신의 실상을 망각하고 신의 아들으 실상에 어울리지 않는 상념을 일으컬 때 그 상념은 본래 ()의 상념, 비실재의 상념, 부자연의 상념이니까 저절로 해소하고자 하는 운동일 일어나게 된다. 부조화는 곧 악이므로 이악의 파도가 높아질 때는 반드시 높아진 만큼의 수량(數量)이 내려올 때가 오게 된다. 약을 범하고 있는 동안은 행운으로 보였던 것이 해가 감에 따라 그 악의 응보를 받아야 할 불행에 빠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덕자<積德者)에게 여경<餘慶>이 있고 적악자<積惡者>에게 여앙<餘殃>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무엇이 여경이나 여앙을 주는가 하면 이것은 내부에게 본인의 마음(잠재의식)이 여앙을 주는 것이며 마음에 평온하지 못한 것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이 평온치 못한 것을 평온하게 하는 자연의 작용이 일어나게 될 때 그것이 여앙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의 아들에 정녕 어울리지 않는 상념을 일으키거나 행동을 하게 되면 거기에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것이 평탄해지는 작용으로서 불행이라는 것에 빨려드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행이라는 것은 신의 아들이 아닌 거짓된 것의 작용을 해소시키는 작용으로서 일어나는 것이니까 죄의 해소를 시키기 위해여 인도의 바라문 행자 처럼 여러가지 난행, 고행을 스스로 찾아나서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죄 곧 '의 아들로서의 실상(實相)에 어울리지 않는 상념이나 행위'를 일단 범하게 되며 그 죄를 용서받기 위해 병에 걸린다든가 가난을 겪는다든가 가족에게 불행이 일어난다든가 무엇인가 자신이 괴로와 해야 한다는 잠재의식적 관념을 갖게 된다. 각자의 마음 속에 아주 완강해 뽑기 함들도록 숨어있는 이 관념은 표면의 마음은 죄의식도 없고 속죄할 생각이 없다. 하더라도 적당한 시기가 되면 잠재의식 속에서 갖가지 괴로움이나 불행한 환경을 육체위에 실현시키려는 생각의 불의에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화작용 (자기단죄, 자기처벌) 으로 신의 노여움을 달래고 신에게 사과하여 죄를 해결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서 신의 뜻이 아니다. 달래는 상대는 신이 아니라 안긴의 잠재의식의 자기심판 관념이다.{잠재의식의 자기심판 관념}은 아무런 응보가 없이는 죄가 용서되지 않는다고 고민하고 있다. 이토록 고난을 받아댜한 죄는 해결되는 것일까?


신에게 마음을 형할 때 죄(잘못된 생각)는 사라진다.

죄는 어둠이므로 빛을 향하여 얼굴을 돌리기만 하면 죄는 그 순간 사라지게 된다. 참되 빛의 방향으로 돌리기만 한다며 죄의 실체는 이미없는 것이다. 그래서 잠재의식의 자기처벌에 의한 죄의 자정(自淨)에 맡겨둔다며 질병이나 불행, 가난이나 여러가지 고난을 겪고 죄의 집적이 정화될 터이지만 신에게 마음을 돌리고 신에게 기도하고 신에 맺어진다면 그렇게 고난을 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죄의 집적이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고난을 닫앙댜 할 운명을 지닌 것도 이것이 전혀 없어지든가 매우 적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빛쪽으로 돌리면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과 마잧가지이다.

  푸울 에프호오드튼 박사의 <기도는 이루어진다>는 실화는 홍진진한 이야기다. 호도튼 박사는 일해들과 노르웨이를 여행하고 있었다. 일행중의 한 부인이 밀림의 탐험 중에 고무로 만든 덧신 한쪽을 빠뜨렸는데 그것이 아무래도 눈에뜨이지 않았다. 여행의 목적지인 베로겐에 도착할 때까지는 새로 덧신을 구입할 처지가 못되었다. 더구나 이 탐험에서는 덧신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어떻게든 덧신을 찾아내야 되었다. 그래서 일행은 이 잃어버린 신을 찾기 위해여 인원을 나누어 왔던 길을 되돌아왔던 것이다. 어디서 잃었단 말인가? 숲속은 물론 오솔길 아마도 지내왔으리라고 짐작되는 산 속의 길 숲 속의 길을 몇 시간이나 찾아헤맸지만 그 덧신을 찾을 수 없었다. 드디어 일행은 난념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그린데 그날 오후에 일해 중의 호오튼 박사의 머리에 문득 <왜 나는 그 덧신을 찾을 수 있도록 실에게 기도를 하지 않았던가>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박사는 기도를 했고 기도하는 동안 기원이 성취되었다는 확신이 왔다. 박사는 일행을 데리고 아침에 상륙했던 조그만 만으로 가고싶어 노를 저어 갔다. 그곳에서 배를 내린 박사는 일직선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바로 거기 박사의 눈 앞에 잃어 버린 덧신이 뒹굴어 있었다. 그런데 그곳은 이상하게도 몇번이나 기도하기 전에 혈안이 되어 찾던 지점이었다.

 

 또한 일본의 기다무라 씨는 친구들과 등산 중 정상 부근에서 일행이 갈증을 느껴 물을 찾았으나 아무리 찾아도 물은 없었다. 기다무라 씨는 마음 속으로 신에게 기도를 했다. 그러자 이 분은 별안간 자기 혼자서만 일해과 떨어져 밑으로 내려가고 싶어졌다. 그러자 <거기에 물이 있다>는 말이 어디선가 들려왔다. 보니까 풀숲에가리어 졸졸졸 맑은 물이 솟고 있는 게 아닌가! 작은 양으로 졸졸 솟아나고 있기 때문에 눈이 좋은 사람도 거의 볼 수가 없을 정도의 분량이었으나 그것은 근시(近視) 3도라는 기다무라씨가 신의 인도를 받아 발견한 것이다.

{오늘날 전개되는 인간의 운명} 이라는 것은 지난날의 그사람의 상념의 집적이 현실화한 것으로 이미 수일 전에 결정되어 있다는 많은 사실을 열거했다. 그리하여 거기에 이어서 오늘날의 운명이 오늘의 기원에 의해서 개선되었다고 인정할 만한 몇 가지 실례를 들었다. 1. 우리의 오늘날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2. 그러나 오늘날의 운명은 오늘의 기원에 의해 개선된다. 이 두 가지의 표면상으로 상반되는 듯한 사실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어느 편이나 옳은 것이다. 우리의 <오늘날의 운명>은 이미 우리자신의 과거의 조상들의 상념의 연결되어 전개, 자연적 정화작용으로서 높아가는 파도가 평온해지는 자연의 작용으로서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보복하는 준엄하고 가차없는<혼미의 상념의 자괴법칙>은 그와 같이 준엄한 법칙이며 혼미의 세계에서는 파기할 수가 없다. 다석 가지 죄에는 다섯가지 고난이 있어야 비로소 해소되지만 우리가 일단 신에게 기원을 할 때는 신은 빛이므로 암혹세계의 법칙은 사라지며 그


신에게 기원한다는 것은 신에게 문제를 100% 맡긴다는 의미이다.
부처님(하나님)의 신는 사랑이요 기쁨, 희생 신과 조화이므로 
신과의 조화의 본원인 신이 인도함으로써  
자연히 부조화의 상태가 조화의 상태로 변화 되어진다.

 미계(迷界)의 법칙은 초월당하고 만다. 거기에 열 가지 죄에도 반드시 열 가지 괴로움이 필요하지 않다. 마음이 완전히 100% 신을 향하느냐, 80% 신을 향하느냐에 의해서 과로움도 전적으로 필요없게 되거나 아니면 반으로 줄어드느냐 등등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죄의 자정작용에 맡겨둔다면 몇 년동안이나 육체적 고통을 받고 천금을 의사에게 지불하여 가산을 탕진한 후가 아니면 낫지 않는다는 병이라도 그 반의 괴로움, 반의 비용, 고민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


 신에게 기원한다는 것은 신에게 문제를
100% 맡긴다는 의미가 된다. 신은 사랑, 기쁨의 신과의 조화이므로 사랑의 신이요 기쁨의 신과의 조화의 본원인 신이 인도하므로서 자연히 부조화의 생태가 조화의 상태로 변화되어지는 것이다. 이 때 원하는 샹태로 변화되지 않는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그것은 원하는 상태로의 과정 중에 있거나 또는 그것이 이루너지면 오히려 지신에게 해를 줄 때는 그 기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어버이 같은 사랑의 신, 기쁨의 신, 희생의 신, 지혜의 신이 볼 때는 허락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 것이가. 이때 흔히 원만하기 쉬운데 이때가(시험)일 경우가 많다. 좀 더 기다리라는 뜻이거나, 그 깊은 뜻을 헤아려서 깊이 감사하는 것이 좋다. 모든 것을 맡겼으므로 끝까지 맡기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모든 것을 맡기듯이...,

믿듯이...,

그러므로 오늘날의 운명은 우리에게 있어서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지만 신앞에는 여전히 수정의 여지가 있다. 하물며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도 아직 결정하지 못한 우리의 장래의 운명이 우리의 기원에 의한 신에의 결부에 의해 어떻게 개선, 양화되는  가는 재론한 필요가 없다. 그리 하여 우리가 기원하는 대상인 신은 모든 어둠을 비추는 광명인 신,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무한절대의 사랑의 신인 것이다. 



멕카의 기적

이스람교 최대의 성지인 메카의 카바신전에는 마르지 않는 샘 이 있다. 그샘은 검은 돌 틈에서 솟아나고 있는데 그돌을 가리켜 사람들은 블책스톤(Black stone)이라고 부론다. 이 샘에는 이슬람인들에게 있어서는 최고 조상이 되는 하갈과 이스마에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곳은 마호멧이 이슬람교를 세위 일의킨 그는 이 곳의 검은도(BLACK STONE)이 희어질 때 구세구가 온다'고 예언한 바 있다.


브엘라 헤로이

창세기에는 아브라함의 몸조인 하갈 이 큰 아들 이스마엘 을 낳고 자식이 없는 본처 사라 를 박대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사라가 90세에 이삭(읏음을 되찾아다 는 의미)을 낳음으로 말미암아 결국 하갈은 아브라함의 집으로부터 현재 사우디아라비아로 쪽겨나게 된다. 그후 하갈은 광야를 헤매면서 울며 불며 대성통곡을 하였는데 바로 그 통곡한 자리 뒤에 있던 까만 돌 사이에서 샘물이 나왔다고 한다. 그 샘을 가리켜 브엘라 헤로이 즉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생존자의 우물 이라 하여 아랍 사람들은 최고의 성지로 삼고 있다. 또한 이 곳은 마호멧이 이슬람교를 세워 일으킨 곡으로 그는 이 '검은돌'(BLACK STONE)이 희어질 때 주세주가 온다는 약속을 예언한 바 있다.

 

검은 돌이 희동되다

그런데 874월 중반부터 이 '검은돌'(BLACK STONE)이 갑자기 희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흑인이 자연스럽게 백인이 되는, 있을 수없는 일이 일언난 것이다. 아랍인들은 마호멧이 예인한 바대로 돌이 희어질 때 메시아가 출현한다는 믿음으로 수천년간을 기다려 왔다. 그 오랜 기다림이 이제 놀라움과 감격이 되어 그들을 셀레게 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그리고 불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의 지도자(Messenger)들은 단 한 존재의 출현을 예언했다.

메시아(Messiah).... 마치 '검은돌'(BLACK STONE)이 흰어지듯 도저해 있을래야 있을 수없는, 견딜래야 견딜 수없는 어뗜 경지를 뚫고 솟구쳐 나온 존재... 그의 출현은 그 자체로 인류에겐 희망일 수밖에 없다. 그 존재자체가 가능성 이요. 해답 인 것이다. 검은 돌을 마무리 희게 치한다고 그 속까지 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속에서부처 하얗게 되어 전체가 변해버린 그것 을 도대체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소위 과학적이란 저급한 수사가 얼씬거릴 틈은 그 어디에도 없다.

 

흰돌이 가진 진짜의미

그런데 돌이 희어지는 것은 단지 메시아가 나타났는 것만을 말하는 것일까? 이것이 출현 증표 만 된다면 어쩔 수 없이 인류는 또 메시아를 찾기 위해 헤매야만 한다는 문재도 있다. 보고도 모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 출현과 동시에 출현자소 까지 같이 내포한 것이라면 문제는 횔씬 수워진다. 성경에는 이긴자에게 흰돌을 주는테 그 돌 위에 쓴 새이름은 받는 자만이 알수 있다(2:17)라고 씌어 있다. 흰돌이 이긴자 즉 구세주의 출현 뿐 아니라 또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예측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예언서 중에서 가장 그 예언이 상세하기로 유명한 격암유록(格菴遺錄)’계룡가(鷄龍歌)’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계룡석백비공주(鷄龍石白非公州)

평사지간진공주(平砂之間眞公州)

비산비야백사간(非山非野白砂間)

궁궁십승진인처(弓弓十勝眞人處)


 ‘
계룡석백은 공주의 계룡산이 만함이 아니요, 평사지간진공주(平砂之間眞公州) , 부평(富平) 소사(素砂) 사이가 진짜 공주라는 뜻으로, 계룡석백비공주(鷄龍石白非公州)이란 산도 들도 아닌 백사간이 궁궁십승진인처( 弓十勝眞人處)처 즉 구세구가 거하시는 곡이라는 의미이다.실제로는 소사(素砂)1)라는 지명을 숨겨서 표현한 말이다. 하락요람(河洛要覽)에서는 천봉지탁백사림 백변소화역일립(天崩地柝白沙立 白變素化亦一理)’라 하여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한이 있어도 마지막 하늘의 뜻은 백사에서 이루어지며 이 이 변하여 소가 된다 했다.


결국 성경사의 흰돌은 구세주 출현과 동시에 설법하는 장소 즉 소사(素砂)를 나타낸 말인 것이다! 그런데 이 소사(素砂)’땅도 넓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무학비결)역곡승지(驛谷勝地)’라 하여 20세기 후반에 생긴지명인 역곡십승(十勝)’ 즉 성경의 이긴자가 계산 곳으로 축소시켰다. 그 영곡에서도 해맬까봐 격암유록(格菴遺錄)은 이미 초장(初章)부터 승리대상진십승(勝利臺上眞十勝)2)’ 이라 하여다. 또한 미륵경655절에는 미륵불이 2층 강단에서 극락을 도로 찿아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성불한다 하였으니 그저 꿰어 맞추었다고 보기에 너무 완벽하다. 요컨대 메카의 기적을 가져온 흰돌은 소사(素砂)를 가라킨 말씀이며, 하나님의 신이 각 종교 지도자를 통해서 앞으로 구세주가 소사에서 나타나 역사할 것을 알린 것이다. 메카의 기적'을 가져온 흰돌은 소사(素砂)를 카리킨 말씀이며, 하나님의 신이 각 종교 지도자를 통해서 앞으로 구세주가 소사에서 나타나 역'사할 것을 알린 것이다.

 

참고자료 승리제단

1) 승리제단에 계시는 이긴자께서는 흰돌 위에 씌어진 새 이름은 소사이며 그자체가 이미흰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셨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요한계시록의 비밀이 벗겨진 것이다.

2) 승리제단에서 말씀하시는 분이 진짜 구세주라고 했다.

 


선악과는 생명을 죽이는 마귀의 영, ‘나’라는 주체의식이다

이것은 선악과를 먹기 전의 아담과 하와의 상황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서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2:26~27)’라고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같은 형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가 처음부터 육신을 입었던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먹고 나서부터 현재와 같은 인간의 형상으로 변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즉 선악과를 먹고 나서부터 인간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육신을 입게 되고, 노동을 하게 되고, 자식을 낳고, 급기야는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선악과 사건>은 아담과 하와가 신에서 인간으로 전락된 사건이며 인간불행의 시초가 되는 사건인 것이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에덴동산에서 살았다. 에덴동산이 낙원이요 천국이니 천국에서 살았다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리라고 적혀 있듯이 천국은 하나님만 있는 곳이므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선악과는 바로 하나님이 먹었고, 그 하나님이 인간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완전해지기 전에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이러한 불만족을 해소하고자 더 공부를 하고 일을 하여 돈을 축적하고 좋은 약을 먹지만 일시적인 불만족은 해소 할 수 있다 치더라도 궁극적인 불만족은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내일이면 나을까 모레면 나을까 내년이면 나을까 대학 나오면 나을까 결혼하면 나을까 돈을 모으면 나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리도 해보고 저리도 해보면서 기다리고 또 기다려 봐도 찾고 구하던 것은 오지 않고 늙고 병들어 한 많은 인생을 살다가 결국에는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인간인 것이다.

이러한 생로병사의 윤회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인데, 이 생로병사의 근본적인 해결이 없이는 인간에게 결코 행복과 만족은 존재할 수 없으며, 이 생로병사의 고통이 인간 본래의 속성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완전한 것과 영원한 것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완전성과 영원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은 인간이 원래는 완전하고 영원한 존재였다는 증거가 되며, 다시 이 완전성과 영원성을 되찾기 전에는 인간에게 결코 만족과 행복이 성취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인간의 비 본래적인 상황이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 이 세상에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성경에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후부터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하게 되었다고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악과를 먹기 전의 아담과 하와의 상태와 선악과를 먹은 후의 아담과 하와의 상태를 살펴봄으로써 우리 인간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육체가 바로 영혼이다.

성경 요한복음 1장부터 보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는데 이 말씀은 빛이요, 빛은 곧 성령이라이 빛은 사람속의 생명이라는 말로 봐서 알 수 있듯이 생명이 영혼이다.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 있다(4:23)’는 구절을 봐서 생명이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흔히 세상에서 사람을 가리켜 만물의 영장이라는 표현을 즐겨 쓰며, 사람에게는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영적 동물이라고도 한다. 이는 마음이 바로 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마음과 생각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 인간 개개인의 피의 형태와 움직임에 따라 생각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서 혈액형이 A형인 사람은 성격이 꼼꼼하고 B형인 사람은 사교적이며 남의 비위를 잘 맞추는가 하면 O형은 성격이 과격하고 고집이 무척 세다. AB형은 변덕쟁이의 마음을 갖고 있다. 이처럼 혈액형에 따라 사람의 성격이 다르며 같은 혈액형이라도 다 다르다. 이는 그 사람의 핏속에 들어 있는 성분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피의 작용이 마음작용이라는 것은 마음을 바꾸면 피()를 바꿀 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성경의 다른 구절에는 피가 곧 생명(17:11,9:4)’이라고 된 구절이 있는데, 생명은 바로 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영혼=마음=피의 관계가 성립하며 피로써 살이 되고 몸이 되니 생명 즉 영혼이 바로 살아있는 육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이라는 것은 몸은 죽고 영혼이 천당이나 극락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몸이 바로 영혼이니 이 몸을 죽지 않게 영생 불사·체로 만들어 주고 지금 인간들이 겪고 있는 모든 괴로움과 고통을 제거해 줘야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을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몸으로 변하게 해 주는 것이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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